[이코노미조선]원스 어폰 어 와인 <20> 볼랭저007 신작 ‘노 타임 투 다이’가 개봉됐다. 새 시리즈가 발표되면 영화 못지않게 자동차, 시계, 휴대폰 등 제임스 본드가 사용하는 모든 것이 화제가 된다. 술도 예외는 아니다. 그가 즐겨 마시는 술은 보드카 마티니와 샴페인, 그리고 샴페인 중에서는 언제나 볼랭저다. 1979년 ‘문레이커’를 시작으로 본드는 무려 42년간이나 볼랭저를 마셔왔다. 볼랭저는 과연 어떤 샴페인일까. 007과의 인연은 어떻게 시작됐을까.노 타임 투 다이 한정판 포스터. 신동와인볼랭저는 1829년 프랑스의 귀족 빌레르몽 백작이 독일 출신 젊은 사업가 조셉 볼랭저와 함께 설립했다. 사업을 시작한지 55년 만에 영국 왕실의 공식 납품 샴페인이 될 정도로 볼랭저의 성장은 눈부셨다. 특히 영국인들은 볼리(Bolly)라는 애칭으로 부를 만큼 볼랭저에 대한 애정이 각별했고, 빅토리아 여왕도 다른 샴페인보다 유독 볼랭저를 자주 즐겼다고 한다. 100년 뒤에 제임스 본드의 ‘최애’ 샴페인이 될 인연이 어쩌면 이때부터 이미 싹튼 것일지도 모르겠다.1941년 2차 세계대전 한 중간에 볼랭저는 위기를 맞이했다. 3대손이자 오너였던 자크 볼랭저가 사망했고 포도밭은 폭격을 맞아 폐허가 됐으며 샹파뉴를 점령한 나치는 툭하면 샴페인을 약탈해 갔다. 하지만 자크의 아내 릴리는 슬픔에만 빠져 있지 않았다. 그녀는 지하 와인셀러를 방공호로 개방해 마을 주민들이 폭격을 피할 수 있도록 도왔고 사망한 사람들의 장례식도 치러 주었다. 전쟁이 끝난 뒤에는 버려진 포도밭을 사들여 재건했고 샴페인의 생산량도 다시 늘렸다. 영어에 능통했던 그녀는 세계를 누비며 마케팅에도 힘썼다. 위기를 기회로 삼아 회사를 더 크게 발전시킨 것이다.007 원작 소설에는 볼랭저 외에도 다양한 샴페인이 등장한다. 영화의 경우 초기에는 돔 페리뇽이 사용됐는데, 제임스 본드의 이미지와 돔 페리뇽이 잘 어울리지 않는다고 판단한 영화사는 볼랭저에 협찬 의사를 타진했다. 대대적인 홍보 효과가 기대되는 좋은 기회였지만 볼랭저의 회신은 뜻밖이었다. 무료로 제공하기에는 볼랭저가 너무 소중하다는 답변이었다. 하지만 일언지하에 거절하기가 미안했을까. 볼랭저는 대신 영화사를 와이너리로 초대했다.그런데 릴리의 주최로 열린 만찬에서 반전이 일어났다. 서로 뜻이 잘 통한 양측이 볼랭저를 협찬이 아닌 ‘우정 출연’시키기로 합의한 것이다. 그렇게 맺은 42년 전의 약속은 지금까지 지켜지고 있고, 볼랭저와 영화사는 매년 한 차례씩 만나며 영화와 샴페인에 대해 논의하는 사이가 됐다. 계산이 판치는 냉혹한 비즈니스 세계에서 드물게 보는 ‘찐우정’이다.길고 복잡한 볼랭저 지하 셀러. 신동와인피노 누아와 지하 셀러가 탄생시킨 깊고 진한 풍미볼랭저는 누구나 인정하는 세계적인 샴페인이다. 하지만 이런 인기가 그저 영화를 통한 홍보 효과일 수만은 없다. 꾸준한 사랑을 받는 것은 무엇보다 품질이 남다르기 때문이다. 비결이 뭘까.볼랭저의 가장 큰 특징은 묵직한 보디감과 우아한 풍미다. 그리고 이런 매력은 바로 피노 누아(Pinot Noir)라는 적포도에서 나온다. 샴페인은 피노 누아, 피노 뫼니에, 샤르도네라는 세 가지 품종으로 만드는데, 볼랭저는 그중에서도 유독 피노 누아를 많이 사용한다. 이는 볼랭저의 포도밭 중 60%가 샹파뉴 지역 안에서도 최고의 피노 누아 산지로 꼽히는 몽타뉴 드 랭스(Montagne de Reims)에 위치하고 있기 때문이다. 다른 생산자들보다 좋은 피노 누아를 더 많이 생산하니 맘껏 쓸 수 있는 좋은 조건을 갖추고 있는 것이다.깊은 풍미 또한 볼랭저의 자랑이다. 샴페인은 숙성이 길수록 풍미가 좋아지는데, 볼랭저의 샴페인들은 엔트리급이 최소 3년, 프리미엄급은 6~10년 이상 숙성을 거친 뒤 출시된다. 샴페인을 오래 숙성시키려면 당연히 셀러가 커야 하는 법. 볼랭저의 지하 셀러는 총 길이가 6km에 이르고 샴페인을 1300만 병 이상 수용할 수 있는 엄청난 규모다.2010년에는 이 셀러에서 대박 사건이 발생한 적도 있다. 수습사원 한 명이 미로 같은 셀러 안에서 길을 잃었는데, 나오는 길을 찾아 헤매다 우연히 한쪽 구석에 묻혀 있던 오래된 샴페인 600병을 발견한 것이다. 빈티지를 확인해 보니 1921년산이 최신이었고 그중 54병은 심지어 1830년산이었다. 더욱 놀라운 것은 상당수가 여전히 마실 수 있는 상태였다는 점이다. 이때 발견된 1914년산은 소더비 자선 경매에서 1만2250달러(약 1470만원)에 팔리기도 했다.볼랭저의 지하 셀러에는 아직 발견되지 않은 샴페인들이 더 있을 거라고 한다. 1,2차 세계대전 때 폭격을 맞아 셀러의 곳곳이 무너졌는데, 구조가 너무 방대하고 복잡해 그때 파묻힌 샴페인을 다 찾아내기가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언제 또 굉장한 발견을 하게 될지는 모를 일이지만, 볼랭저의 품질이 긴 세월이 지나도 변치 않을 만큼 뛰어나다는 사실만은 증명이 된 셈이다.그렇다면 볼랭저의 샴페인들은 과연 어떤 맛일까? 최근 출시된 ‘노 타임 투 다이’ 특별 한정판은 피노 누아 60%, 샤르도네 25%, 피노 뫼니에 15%로 만들었다. 레몬 빛이 영롱하고 사과와 복숭아 등 과일 향이 풍부한 이 와인은 벨벳처럼 부드러운 질감과 탄탄한 구조감이 강인하면서도 우아한 제임스 본드를 연상시킨다.라 그랑 아네(La Grande Année)는 볼랭저가 포도 작황이 탁월한 해에만 생산하는 샴페인으로 발효와 숙성을 모두 배럴에서 진행해 복합미를 한껏 끌어올린 것이 특징이다. 2012년산은 와인 스펙테이터(Wine Spectator)가 발표한 2020년 100대 와인 중 10위를 차지해 거의 품절된 상태다. 2014년산이 내년 초에 출시될 예정이라고 하니 새 빈티지를 기대해 보기로 하자.R.D.는 볼랭저를 대표하는 프리미엄 샴페인이다. R.D.는 ‘Recently Disgorged’의 약자로 출시 직전에 효모 앙금을 배출했다는 뜻이다. 샴페인은 효모 앙금이 담긴 채 숙성되는데 앙금을 빼내는 시점에 따라 와인 맛이 달라진다. 현재 구할 수 있는 R.D.의 최신 빈티지는 2007년산이다. 맛을 보면 14년이라는 긴 세월이 믿기지 않을 정도로 신선함이 탁월하다.마지막으로 비에이유 비뉴 프랑세즈(Vieilles Vignes Françaises)는 볼랭저의 포도밭 중에서도 가장 뛰어난 밭 두 군데의 피노 누아로 만든 아이콘급 샴페인이다. 부드럽고 묵직한 질감이 입안을 가득 채우고 달콤한 과일, 견과, 토스트, 바닐라 등 다채로운 향미가 마치 마법처럼 끊임없이 피어난다. 워낙 소량 생산이어서 값이 비싸고 구하기도 쉽지 않지만 와인 버킷 리스트를 작성한다면 빼놓아선 안될 명품이다.- 더 많은 기사는 이코노미조선에서 볼 수 있습니다.